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합스부르크 가문 (문단 편집) === 시골의 백작 가문에서 제국의 황실로 === 지금이야 영세 [[중립국]]이지만 당시 [[스위스]]는 독립된 구심점을 갖지 못하고, 몇몇 유력 가문이 세력권을 다투고 있는 상황이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10세기까지만 해도 [[알프스 산맥]] 언저리에 웅거하던 시골 귀족 가문이었다. --[[호족]]-- 더 정확히 말하자면, 10세기에는 '합스부르크 가'라는 이름 자체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아예 근본도 없는 가문은 아니었으며, 애초에 합스부르크 가문은 7세기경부터 [[알자스]] 일대에 터를 잡으며, [[교황]]을 배출한 적도 있는 대귀족인 에티호넨 가문의 [[방계]] 가문이어서 어느 정도 나름의 명예는 있었다. 이 중 브라이스가우 백작 군트람에게 아들 로첼린이 있었다. '''1020년경''' 로첼린의 장남으로, 합스부르크 가의 [[시조]]인 라트보트(Radbot)가 오늘날 스위스 아르가우 지방 [[합스부르크|하비히츠부르크]]에 기반을 잡고, 성을 쌓은 이후 [[백작]] 노릇을 하면서 비로소 합스부르크 가문이 시작되었다. 이 [[https://en.wikipedia.org/wiki/Habsburg_Castle|합스부르크 성(Schloss Habsburg)]]이 바로 가문명의 유래이다. 정확히 라트보트의 작위명은 클레트가우(Klettgau) 백작이었다. 훗날 그의 손자인 오토가 처음으로 합스부르크 백작을 칭했으며 이 합스부르크 가문이 스위스 [[아르가우]] 주를 벗어나 유럽의 패자로 급부상할 계기가 마련된 것은 13세기 [[신성 로마 제국]]의 [[대공위시대]](1254~1273)였다. 강력한 위세를 지닌 교황이 [[황제]]를 견제하기 위해 잇달아 [[파문]]을 날려 버리는 상황 속에서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후사가 끊겼다. 이후 강력한 교황권 및 제후 간의 권력 다툼으로 약 20년간 황제가 선출되지 못하며 대공위 시대의 혼란한 상황이 이어졌다. 대공위(空位) 시대가 이어지며 독일의 정세가 혼란해지자 이제는 교황이 제발 누구든 황제가 되어달라고 애걸하는 상황에 이르렀으나, 선거권을 가진 제후들은 내가 황제를 하기는 싫지만 남의 세력이 커지는 것도 원치 않았고 이런 와중에 독일계가 아니라 슬라브계인 [[보헤미아 왕국]]의 [[오타카르 2세]]가 가장 강력한 황제 후보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결국 라이벌 가문도 싫고 슬라브인인 오타카르 2세도 싫은 독일귀족들이 타협책으로 일부러 한미한 가문의 가주를 [[바지사장]] 삼아 황제로 옹립하려 했는데, 이때 포착된 것이 바로 합스부르크 가문이었다.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은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세력이 큰 가문이 아니었기에 황제 가문으로 고려되지 않았다. 하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의 합스부르크 백작 루돌프 4세에겐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대자'라는 배경이 있었으며, 황제 선거가 난항을 겪자 [[마인츠]] 대주교와 [[호엔촐레른 가문]] 출신의 [[뉘른베르크]] 성주 프리드리히 3세[* 루돌프 1세의 첫 부인인 호엔베르크의 게르트루데가 호엔촐레른 가문 슈바벤계의 [[후손]]이라 먼 [[친척]]이었다.]는 합스부르크 가문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황제 자리를 생각치도 않았던 루돌프 4세는 자신에게 기회가 생기자 기민하게 독일 주요 가문과 재빨리 혼인 동맹을 맺었다. 그 결과 1273년, 루돌프 4세는 [[독일왕]]으로 선출되었고, [[아헨]]에서 [[대관식]]을 치러 '''[[루돌프 1세]]'''로 즉위하여 대공위 시대가 종식되었다. 생각지도 않게 아르가우 주의 일개 백작에서 독일왕이 된 [[루돌프 1세]]는 주어진 기회를 이용할 줄 아는 야심가였다. 왕위에 오른 루돌프 1세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가문의 영지를 적극적으로 확장했다. 협소한 스위스 산골짜기를 벗어나 평야지대로 확장을 모색했던 루돌프 1세가 포착한 곳이 [[오스트리아 공국]]이었다. 때마침 오스트리아는 [[바이에른]] 공국에서 분리독립한 이래 오스트리아를 통치해왔던 바벤베르크 가문이 단절되어 공위 시대(1243~1278)의 혼란기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루돌프 1세는 독일왕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1278년 '''마르히펠트 전투'''에서 라이벌인 [[보헤미아 왕국]] [[프르셰미슬 왕조]]의 [[오타카르 2세]]에게 승리, 그를 전사시켰고, 오스트리아 공국과 그 형제국인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을 차지하여 맏아들인 [[알브레히트 1세|알브레히트]]에게 주었다.[* 원래는 알브레히트와 그의 동생 루돌프에게 나눠주었으나 마음을 바꾸어 알브레히트에게 몰빵하고 둘째에게는 이름만 남은 [[슈바벤]] 공작위를 하사했다.] 한편 루돌프 1세가 바깥으로 돌아다니는 사이, 1291년 스위스 4개 주가 스위스 동맹을 결성하여 반란(독립 투쟁)을 일으켰다. 결국 1315년 스위스가 독립에 성공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거지는 오스트리아가 되었다.[* 이후 스위스와 합스부르크는 시시때때로 충돌하고 영합하며 처음의 종속구도에서 차츰 지분을 양보해주는 식으로 변모해갔고 스위스의 독립 달성은 수세기 후 [[30년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성취되었다. 참고로 [[네덜란드]] 또한 합스부르크 속령화와 독립 과정에 있어 스위스와 [[싱크로]]가 상당히 맞아 떨어진다. 차이점이라면 400년 정도 시간차가 난다는 정도이다.] 루돌프 1세의 사촌들로부터 기원한 분가들은 여전히 스위스 부근에서 활동하였는데, 본가와는 다른 독자노선을 추구하다 15세기 초쯤에 단절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